글 써야지 써야지 생각만 하고
현생이 너무 바빠서 도통 시간을 낼 수 없었다
회사스트레스로 정신과약을 일 년 정도 복용했고
그 과정에서 휴직-복직-팀이동-팀이동을 겪었으며
오래 만난 애인과도 헤어졌다
결국 도망치듯 퇴사했고, 퇴사 이후에 단약 했다
약 7개월간 백수로 회복기간을 가진 후
다시 새로운 회사로 복귀한 지 이제 6개월,
단약 이후 한 번도 다시 약 먹은 적 없으니
이제는 제대로 약을 끊었다는 생각이 든다
뭐 꼭 먹으면 안 된다 이런 건 아니어서 먹어도 되는데
이제는 그 존재자체가 희미해져 사실상 필요가 없다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어제부로 출근한 지 딱 200일
이 회사에서의 업무강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열정적이고 성격 급한 팀장과
성과를 빨리 내야 하는 상황인 임원의 콜라보
많은 체력과 시간을 업무에 쏟고 있다
힘든 건 맞는데 또 그만큼 배우는 것도 많고
업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많이 알아가는 시간이다
개인적으로 올해 하반기 이전에 업무상 꼭 달성하고 싶은 게 있어 하루하루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처음 들어왔을 땐 3개월만 버텨보자는 작고 하찮은 목표뿐이었는데
지금은 더 나아가 내 이력서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까지 하고 있다니 장족의 발전이다
이 회사에서 이력서에 마크업까지 남길 수 있다면
정말 럭키 그 자체가 아닐까..
사실 이 회사에 이렇게 오래 다닐 생각은 없었는데
예상외로 팀 사람들이 너무 좋았고
업무적으로도 챌린지 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게
어찌 보면 나에게 큰 행운이지 않았나 싶다
입사 전에는 예전의 기억들이 PTSD로 남아서 너무 힘들면 어쩌나 싶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다시는 사기업에 발을 들이지 못할 거라는 불안을 품고 한 퇴사였는데, 생각보다 내가 회복탄력성이 좋은 인간이었나 보다
많이 부족한 나를 인내하며 달래고 북돋아주는 팀원들
항상 고마운 마음뿐이다 (물론 빡칠때도 많지만)
상부상조 선순환구조
서로 돕고 돕는, 그러면서도 사생활의 선은 넘지 않는
내가 그려왔던 이상적인 팀원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미울 때도 많지만 분명 각자에게 배울 점도 많다. 설사 그게 반면교사라고 할지라도..
회사일은 회사일대로 열심히 하면서
연애와 취미생활 뭐 하나 빠진 것 없이 성실하게 임했다
무계획퇴사 후 배워둔 베이킹이 이제는 내 취미이다
스트레스를 좀 받은 날에는
집에 오자마자 버터와 계란을 실온에 꺼내놓는다
저녁을 챙겨 먹고 버터와 계란에 어느 정도 냉기가 가시면
졸린 눈을 부벼가며 녹차쿠키며 크랜베리파운드케이크 따위를 만든다
다음날 회사팀원들한테 나눠주면
또 분노의 베이킹을 했냐며 웃는다
그럼 나도 웃고,
적당히 재미있는 회사생활이다
나는 일평생 주방에는 근처도 안 가본 사람이었는데
베이킹 이후로 내 적성을 찾았다
정말 재밌고 즐거운 취미다
최근에는 요리도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베이킹 배우기 전에는 계란도 잘 못 깼었다
지금은 요리할 때 눈대중만으로 간을 맞출 수 있을 정도다
마트 신선코너를 돌아다니며
저렴하고 신선한 식재료를 매의 눈으로 찾고
그걸로 뭘 해먹을지 고민하는 게 하루의 가장 큰 행복이다
같은 양파여도 깍둑썰기했다가 채 썰기도 해 보고
어떤 때는 다져도 보고 카라멜라이징도 해본다
다양한 재료의 조합과 조리법이 날 설레게 한다
나의 창의력과 호기심과 창조욕구를 자극한다
왕복 세 시간 반 출퇴근하면서도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은 꼭 요리를 해 먹는 이유이다
휴식기를 가지지 않았다면 이런 적성은 절대로 몰랐을 거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들 하던데, 나는 도망치다가 소를 잡아버린 게 아닐지..
당연히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다
퇴근길 두 시간 내내 울면서 운전한 적도 있고
후회와 자괴감으로 잠 못 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킥도 많이 했다
하지만 내 인생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 상태로 지속해보려 한다
커리어적으로 지금 나에게 주어진 기회가 흔치 않다는 걸 알기에
더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려 한다
전회사에 버티지 않았다면 지금 나에게 온 기회가 희귀하다는 것도 몰랐겠지, 하는 생각도 해본다
모든 건 일장일단
하지만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말아야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건 없다 모든 건 내 의지
관두고싶으면 관두면 된다
어떻게든 길은 열린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
청춘일 때는 청춘을 모르고 젊은이들은 젊음을 모른다고
나중에 돌아보면 지금 내가 쌓아가는 이 시간들이 전부 자양분이 되어 나를 구성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언제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얽매이면
계속 그 상태에 머무를 뿐이다
내가 무엇을 잃었던 또 무엇을 잘못했던
그것과 상관없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다 보면
어느새 많은 게 해결되고 또 다른 길이 열릴 거라는 것
그리고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일 수 있는데
너무 많은 의욕을 가지지 않으려 한다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많아도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차근차근
의식적으로 휴식기를 가지고 회복을 위해 시간을 쓸 것
언제나 “지속가능한 정도”의 상태를 유지할 것
이제는 약 먹고 힘들었던 시기가 아주 옛날처럼 느껴진다
몇 월에 단약 했고 뭘 먹었는지
그 디테일도 모두 잊어버렸다
역시 인간은 망각의 동물, 축복받은 존재이다
다시 약 먹고 싶어지면 어쩌지 고민했던 게 허무할 정도로
약의 존재 자체를 잊고 지냈다
아직도 먹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스페어 약들
지금은 어느 서랍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2022년
편하고 행복했던 것도 맞고
싫고 힘들었던 것도 맞다
인생은 단짠단짠
달달 할 땐 달달함을 즐기고
짤 땐 또 묵묵히 있는 게 인생인 거 같다
올해에는 조금 더
받은 만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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