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약 단약 - 7개월차 후기
사실 이제는 약 먹은지도 오래되었고, 내 인생에서 정신과라는 단어가 사라진 지 워낙 오래되었기 때문에 가물가물하긴 하다
그래도 한 번쯤은 정리해보고 싶어서 써보는, 정신과 약 단약 7개월 차 후기
나는 회사 스트레스 때문에 불안증, 우울증, 공황 등으로 일 년 좀 넘게 약을 먹었었고
의사 선생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ㅋㅋㅋ 임의대로 약을 끊었으며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와 방법이 있었음)
단약 한지는 어느새 딱 7개월이 되었다.
자세한 건 과거 글을 참조해주세요
2020.10.26 - [Personal review] - 정신과 첫 번째 상담 후기 :상담비용 약물 부작용 실비보험
2022.01.03 - [Personal review] - 정신과약 단약 후기 - 1개월차
2021.03.31 - [Personal review] - 정신과약 복용 6개월차 후기 (20년 10월 ~ 21년 3월)
정신과약 끊은 이후, 가장 크게 체감한 것
약 끊은 초창기에는 사실 별 차이 없었다
복용량 줄여본 분들은 누구나 공감하시겠지만, 약을 전부 안 먹고 난 이후에도 일주일~ 정도는 약한 두통이나
살짝 울렁거리는 그런 증상이 있었음
감약할 때마다 나타나는 증상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고 지나갔음
약 끊고도 두세 달까지는 내 몸의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음
말하는 거 행동하는 거 전부 평소랑 똑같은 느낌
그냥 나는 나로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
두통 같은 거 없었음
대신 그동안 회사 스트레스 때문에 약을 먹어왔었는데, 퇴사 이후에 단약 한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스트레스 요인이 없어서 무난하게 넘어간 걸 수도 있다
단약 세 달쯤 넘어가니 뭔지 모르게 머리와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뇌회전이 확확 잘 된다고 해야 하나.. 내 생각의 속도가 예전에 비해서 확연히 빨라졌다는 느낌?
그리고 좀 더 다차원적 생각이 가능해졌다는 느낌이 있었다
약 먹는 동안은 쌍방향으로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360도 전방향에서 생각하고 있구나 싶을 때가 종종 있었음
내 뇌가 핸들링할 수 있는 범위가 두배는 더 늘어난 느낌? 이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것 같다
어쨌든 일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약을 복용했으니.. 약물의 여파가 완전히 없어지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된 것 같았다.
정신과 약이 뇌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겪고 나니 약물 복용 전/후가 생각보다 꽤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아 놀라웠다
생각의 CAPA가 늘어나니 자연히 행동도 훨씬 빠르고 민첩해졌다
예전에는 멍 때리다가 두 번 세 번 네 번 일하던 것도 점점 한 번에 끝냈고, 멀티도 가능해졌다
약기운이 전부 빠진 후의 느낌?
지금 단약 7개월차
빠릿빠릿해진 나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느낌이다
약기운이 완전히 빠졌다는 걸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느낌상으로는 약 복용 당시의 느낌이 하나도 없다.
고차원적으로 생각하거나 처신하는 나를 보면서 좀 뿌듯할 때도 있고, 여러 stakeholder 사이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서 최적의 방법으로 행동할 때 기분이 좋기도 하다
대신 역시나 약 먹기 이전에 나를 괴롭히던 나의 단점들이 그대로 돌아온 기분이다
나는 감정 기복이 꽤 심한 편이라.. 신나서 싱글벙글하다가도 한두 시간 만에 축 쳐져서 우울해할 때가 종종 있었다. (정말 무서운 건 '아무 이유도 없이' 즐겁거나 우울한 감정 기복이 반복된다는 것)
이런 증상은 특히 생리 직전 일주일 PMS 기간에 정말 심해지는데.. 그동안 약 먹으면서 잊고 지냈던 감정 널뛰기가 다시 돌아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내가 먹었던 약물들이 감정 기복의 폭을 줄인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었는데, 단약 하면서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약기운까지 전부 없어지고 나니 원래의 증상이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약 먹을 때의 내 감정은 '평상시보다 약간 더 우울한 정도'에 쭉 머물러있었다면
최근은 '아주 우울함'과 '꽤 행복함' 그 사이 어딘가를 계속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다
숫자로 따지면 약 먹을 땐 -100과 +100 사이의 -20 정도에 머물러있다가, 최근에는 -80과 +60을 왔다 갔다 하는 느낌
또 예민함의 정도도 심해졌다
원래부터 어딜 가든 예민충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예민한 편인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예민했다고?? 싶을 정도로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최근에 스트레스받아서 좀 격하게 예민해진 게 아닐까? 싶다가도, 약 복용 이전의 나를 돌아보면 그때와 비슷한 정도의 예민함인 걸로 볼 때 나는 그냥 원래 이런 사람인 걸로....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도 단점이라는데, 예전에 비해 생각이 몇 배로 많아진 것도 있다.
사소한 일인데도 나도 모르게 1부터 100까지의 가능성을 쭉 훑어보고 + 상대방이 그렇게 행동한 원인까지 싹 분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내 의도가 아님 ㅠㅠ 무의식 중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A라는 사람이 abc라고 행동하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던 것들이
요즘에는 나도 모르게 'A라는 사람에게 d라는 일이 생겼구나. 그래서 e라는 감정을 느끼고 f와는 이런 사이가 되면서 g라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결론적으로 abc라는 행동을 했겠구나~' 기타 등등 이런 식으로 더 길게 생각하게 된다.
abc라는 행동을 보자마자 한 3초 만에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데 이걸 막을 수도 없고.. 거의 그냥 자동이다
사람 만날 때마다 생각도 많아지고, 고려하게 되는 변수도 많아져서 머리가 복잡해질 때가 많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이것저것 추론하고 분석하게 되면서 말도 안 되는 추측이나 망상도 좀 늘어가는 기분도 든다
생각을 좀 줄일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어느 쪽이든 중용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약을 먹으면서 거의 중용으로 수렴해가던 균형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결국 정신과 약을 다시 먹어야 하는 걸까? ㅠㅠ
이래서 약을 완전히 끊기는 어렵다고 하는구나, 이렇게 평생 먹게 되는구나 싶다
요즘엔 다시 먹어볼까 싶기도 하다
너무 대용량은 말고, 나의 장점을 너무 죽이지 않으면서 내 단점을 조금이라도 억누를 수 있는 정도면 좋을 것 같다
간에 너무 무리가 가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것까진 너무 많은걸 바라는 거겠지
그리고, 애초에 가장 처음 정신과 약 복용하게 된 계기가 회사에서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데 최근에 다시 회사를 다닐 일이 생겨서 아주 많이 걱정스럽기도 하다
7~8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경력이 끊기기도 했고 (아이도 없는데 경력단절이라니)
헤드헌터들의 연락이 올 때마다 다들 공백기가 길다고 하니, 괜히 나중에 회사를 아예 못 다니게 될까 봐 미리 겁먹은 것도 있다
뭐 이런저런 이유로 다시 회사를 다니기로 마음먹었고 일단은 한두 달만 일하자는 마인드로 가보려고 한다
나라는 사람이 뭐 회사를 즐겁게 룰루랄라 다니는 편도 아니고 ㅠㅠ 그냥 감만 잃지 말자, 한두 달의 월급만 당겨보자, 단절되기 직전의 경력을 조금이나마 붙여보자- 뭐 그런 생각이다
내 목표는 회사에서 세 달 버티기, 이다
어찌 됐든 예전의 회사생활이 힘들었던 게 사실이고 그때의 괴로웠던 기억도 전부 남아있어서, 회사 출근과 동시에 PTSD처럼 그때의 증상 같은 게 확 몰려올까 봐 걱정도 된다..
첫 출근날에는 아마도 자나팜 두세 알을 챙겨야 할 것 같다.
정신없고 괴롭겠지만 그래도 즐거운 생각을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새로운 사람 만나서 수다 떨고 그 사람 인생 얘기도 듣고 회사 얘기도 듣고, 오랜만에 오피스룩 입으면서 멋있는 커리어우먼 느낌도 내보고 뭐 재밌을 거다
출근 좀 해보고...
당초에 약 복용했던 원인을 제대로 마주한 후에
제가 단약을 제대로 한 건지, 정말 내 인생에 약이 더 이상 필요 없는 건지 한번 제대로 체감해보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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